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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시방변만불사상(十方遍滿佛思想)은 오늘의 지금 이 세계에도 불(佛)이 시방 어디에나 가득 존재한다는 신앙

마음공부

by 수자령천도업장소멸 소원성취불교기도발원문 2023. 11. 27.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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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만(遍滿)---‘변만’은 우주에 두루 차 있다. 우주에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화엄경>에서 시방변만불사상(十方遍滿佛思想)은 오늘의 지금 이 세계에도 불(佛)이 시방 어디에나 가득 존재한다는 신앙이다. 부처님은 없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화엄경>의 교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Virocana)이다. 시방변만불사상이 철저하게 되면 내재불사상(內在佛思想)이 된다. 즉, 불이 바로 지금 우리들 가운데 존재한다는 신앙이다. 이것은 <열반경> 등 제2기(AD 4세기) 대승경전에서 볼 수 있는 사상으로서, 여래장(如來藏)이라든가 불성(佛性)이란 말이 그것을 나타낸다.
다음은 <원각경> ‘보안보살장’에 나오는 말이다. 
“선남자여, 깨달음의 성품이 두루 원만해서 청정하고 요동치지 아니해 뚜렷함이 끝이 없으므로 마땅히 육근(六根)이 법계에 변만한 줄 알며, 근(根)이 변만하므로 육진(六塵)이 법계에 변만한 줄 알며, 진(塵)이 변만하므로 사대(四大)가 법계에 변만한 줄 알며, 이와 같이 내지 다라니문이 법계에 두루 변만한 줄 알지니라(善男子, 覺性遍滿 淸淨不動 圓無際故 當知 六根 遍滿法界. 根遍滿故 當知六塵 遍滿法界. 塵遍滿故 當知 四大遍滿法界 如是乃至 陀羅尼門 遍滿法界).”
※遍---이 글자는 원래 ‘편’이라 발음하는데, 여기서는 ‘변’으로 발음한다. 
 
 
*변만불(遍滿佛)---부처는 오로지 석가모니불 한분만이라는 사상이 아니라, 변만(遍滿)은 우주에 가득 차 있다는 말로서, 부처가 많고 많아서 우주에 가득 차 있다고 하는 것이 변만불 사상이다. 
<화엄경> 화장세계는 셀 수도 없이 많은 꽃들이 피는 세계이다. 즉, 화장장엄 세계, 조화로운 세계를 말한다.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한 보살들이 부처님의 세계를 드러내고, 부처님 세계가 보살행을 통해서 장엄되고 있다. 범부 중생이 부처의 삶을 살게 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불도의 완성을 위한 갖가지 수행 방편과 실천에 대해서도 설법하고 있다. 온 우주 법계에 충만한 변만불(遍滿佛)로서 모든 존재가 비로자나 부처님의 화현 아님이 없다. 개개 존재가 고유한 제 가치를 평등하게 다 갖고 있으니 여래의 지헤인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범부가 그대로 부처라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는 것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른 점은 다만 발심(發心)에 있다. 중생은 자기가 바로 부처인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로 부처인 것을 자각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화엄경>에서는 말한다. 신심(信心)은 자기가 부처인 것을 믿는 것인데, 이런 깊은 신심을 성취하려면 원력(願力)이 있어야 한다. 이런 신심이 바탕이 돼야 발심이 일어나고, 발심 중생이 곧 보살이다. <화엄경>에서는 발심만하면 정각한다고 강조하고 있다[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처음 발심할 때에 바로 정각(正覺)한 것이라고 설법하고 있다. 그래서 비로자나 부처님의 세계를 구현해 나가는 것이 바로 <화엄경>의 보살행이다. 우리 모두 현재 이 자리에서 화엄의 꽃이 되고 화엄의 꽃을 피우는 불자가 돼야 하겠다. 
 
 
*변문(變文)과 경변화(經變畵)의 관계---변문은 난해한 불경 내용을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풀어 적은 것이고, 경변화는 불경의 내용을 장엄하면서도 화려한 그림으로 변화시킨 것을 말한다.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경문을 흥미진진하면서도 감동적인 내용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이 둘은 닮았다. 말하자면 변문은 문자화 된 경변화이고, 경변화는 채색화되고 시각화된 변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둘은 닮았다고 하겠다. 경변화의 대표적인 것이 변상도(變相圖)라 하겠다.
‘변문’이란 당(唐)대부터 발생해 당말 오대 시기에 성행했던 운문과 산문이 섞여 있는 구어체의 문장으로 변문의 발생과 기원, 용도에 관해서 매우 많은 견해가 존재하는데, 공통적인 의견은 ‘구연(口演)’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구연’은 대중성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때 속강승(俗講僧-일종의 변사)이라 불리는 승려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람들을 모아 경전을 낭독하며 불법의 전수와 포교활동을 했다. 점차 대중성이 강조되면서 당시 일반인들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소재인 중국 전통의 ‘효’사상과 이미 우란분회라는 불교행사로 널리 알려진 목련존자가 어머니를 구하는 이야기는 가장 인기 있는 공연이었을 것이다. 즉, 당시에 변문이 불경과 같은 교화와 대중포교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황실과 지배층에서 ‘효’를 선호해 더욱 적극적으로 유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변문과 변사를 활용해 민간에 적극적으로 불교를 전파하고 교리를 쉽게 전달할 생각을 했던 것이다. 
 
 
*변상도(變相圖)---불교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을 시각적으로 조형화한 그림. 불교경전에 나오는 교훈적인 장면 등을 알기 쉽게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을 말하며, 경화(經畵)라고도 한다. 즉, 경전내용이나 붓다 전생 설화, 또는 극락이나 지옥의 모습을 주제로 해서 그림으로 묘사한 것인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진상(眞相)을 변화시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변상도라고 한다. 탱화가 벽에 걸어두기 위한 액자형 불화인데 비해, 변상도는 불경에 그리거나 나무판이나 금속판에 새긴 판화형이 대부분이다. 법화경변상도, 화엄경변상도, 관무량수경변상도, 범망보살계경변상도 등이 유명하다.
 
 
*변성성불(變性成佛)---고대 인도에서 남녀 차별이 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논의 된 이론이다. 변성성불은 여성의 육신을 가지고는 성불할 수 없지만 남성의 몸을 얻은 다음에는 성불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즉, 여성이 선업 공덕을 지으면 다음 세상에서는 남자의 몸을 받게 되며[변성(變性)], 그때 비로소 성불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윤회사상과 결부돼 여성 성불의 활로를 개척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대승불교에 오면 매우 더 발전한 형태를 보인다. 
<대정신수대장경> 556경인 <칠녀경>부터 574경인 <견고경>까지는 두세 가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변성남자를 설하고 있다. 이 중에서 <칠녀경>은 구류국(拘留國)의 바라문이 일곱 딸의 미모를 자랑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부처님은 ‘사람의 몸은 생로병사에 떨어지므로 미모는 오래가지 않는 것’이라 설한다. 이어서 과거세에 바라나국(波羅奈國) 왕의 일곱 여인이 가섭불의 가르침을 듣고 보리심을 일으켜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게 된다. 수기를 받은 일곱 여성들은 기뻐 허공으로 뛰어올랐다가 땅으로 내려오는 사이에 모두 남자로 바뀌었으며, 그 즉시 다시는 퇴보하지 않는 경지를 얻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상에서 언급된 수기를 받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필요한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전여신경(轉女身經)>에서는 “깊은 마음으로 깨달음을 구할 것, 오만한 마음을 제거하고 속이고자 하는 마음을 없앨 것, 신ㆍ구ㆍ의 3업을 청정하게 할 것.” 등을 말하며, <현수경(賢首經)>에서는 “일체지의 마음을 일으켜 무수한 공덕을 짓는 것, 부처님에게만 의지하고 삿된 것을 믿지 않는 것, 십선계를 지키는 것, 보시와 지계에 철저해 스스로 청정함을 지키는 것, 항상 자비스러우며 일체의 사람과 물건에 대한 탐욕을 버리는 것” 등을 설하고 있다. 
※십선계(十善戒)---속인(俗人)이 지켜야 할 열 가지의 계율. 살생, 도둑질, 간음, 거짓말, 이간질, 멸시하는 말, 실없고 잡된 말, 탐욕, 노여움, 사견(邪見) 등을 금하고 있다.
 
그런데 <수능엄삼매경>은 공사상의 입장에 서서 남녀의 차별을 보는 것은 미망에 불과한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대승의 수행자는 남녀의 차별에 사로잡히지 말고, 「무집착ㆍ공」의 입장에서 평등하게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의거한다면 구태여 남녀차별의 문제가 대두될 여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전에서 “대승에 나아가는 사람은 남녀의 차별을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체지(一切智)의 마음은 3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분별이 있기 때문에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다. … 예로부터 보살을 섬기는 마음에 첨곡(諂曲:아첨과 왜곡)이 없어야 한다. 어떻게 섬기는가 하면 ‘세존을 섬기듯 한다’. 어떻게 해야 마음에 첨곡함이 없는가하면 ‘신ㆍ구ㆍ의 3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한 맛이다. 법성(法性)의 맛을 말하는 것이다. 선남자여, 나는 원하는 바에 따라서 여인의 몸을 갖는다. 만약 나의 몸을 남자의 몸이 되게 하더라도 여인의 특징을 파괴하지도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라. 이것은 남자, 이것은 여자라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생각이다.”라고 했다. 그만큼 대승불교에서는 변성성불을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변식진언(變食眞言)---조금의 음식으로 수많은 음식으로 변하게 해서 많은 사람을 공양할 수 있는 진언을 말한다. 즉, 불단의 적은 공양물을 변화시켜 온 법계의 아귀들과 유정ㆍ무정의 영가들이 두려움을 없애고 공양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진언이다. 변식진언은 <불설구발염구아귀다라니경(佛說救拔焰口餓鬼陀羅尼經)>이라는 경전이 기원이다. 이 경은 짧지만 천도재의 기원이 되는 중요한 경전이기도 하다. 개인적 측면에서는 아무튼 거창한 의례나 행위 없이 진실한 마음과 연민과 자비의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이 간단한 주문만으로도 수많은 배고픈 영가와 아귀에게 공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변역생사(變易生死)---생사(生死)에는 2종생사가 있으니 분단생사(分段生死)와 변역생사(變易生死)이다. 생과 사를 서로 떨어진 분단(分段)의 세계로 생각하는 생사관이 분단생사(分段生死)이다. 우리 범부중생은 노(老)도 받아들이기 어렵고, 병(病)도 받아들이기 어렵고, 사(死)도 또한 받아들이기 어렵다. 생로병사를 이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범부의 생사가 분단생사이기 때문이다. 분단생사관에서 보자면 죽음은 엄청난 공포이다. 그 반대가 변역생사(變易生死)이다. 
생사가 서로 격절된 세계가 아니고 단지 몸만 바뀌어 변화된 세계라고 보는 생사관이 변역생사이다. 생사가 서로 연결돼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의 변화라고 생각하게 된다. 
변역생사관의 근거는 사시(四時)의 순환이다. 생로병사는 춘하추동과 같다고 여긴다.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지만, 겨울이 된다고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다. 다시 봄이 온다. 백발이 되지 않으면 흑발도 나올 수 없다. 밤과 낮도 그렇다. 낮이 생이라면 밤은 작은 죽음이다. 밤과 낮은 고정돼 있지 않고 끝없이 변화한다. 이처럼 생사관을 넘어선, 생사에 대한 집착을 넘어선 경지가 변역생사이다. 
생사유전(生死流傳)하는 중생계는 분단생사(分段生死)로 6도를 윤회하는지라 고통이 끝이 없다. 그러나 아라한은 변역생사(變易生死)를 하며 의생신(意生身-생각으로 태어난 몸)으로 스스로 몸을 바꾸어 자신의 뜻으로 사바세계에 몸을 받아 온다. 또한 정토 보살도 변역생사하며 의생신으로 사바세계에 와서 중생구제를 위한 보살로서의 임무를 마친 후 아미타불께서 만들어 주신 정토에 있는 자기의 아기보살 속으로 가게 된다.---→의생신(意生身), 분단생사(分段生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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