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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碧巖錄)---선승들에게 매우 중요한 심서(心書)

마음공부

by 수자령천도업장소멸 소원성취불교기도발원문 2023. 11. 27.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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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碧巖錄)---선승들에게 매우 중요한 심서(心書)

*벽암록(碧巖錄)로서 선어록의 백미요, 선(禪)의 진수라 일컬어지는 선서이다. 정식 명칭은 <불과환오선사벽암록(佛果圜悟禪師碧巖錄)>이다.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절벽을 마주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제아무리 수재(秀才)라 자부하는 사람도 <벽암록>을 펼치면 벽에 부딪치는 것처럼 되기 일쑤라고 한다. 이 책이 난해할 뿐만 아니라 본성을 다루는 선문에서는 자기가 가진 재주나 알음알이가 오히려 수행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벽암록은 한 사람에 의해 쓰인 책이 아니고 그 구조가 독특해서 본칙(本則), 송(頌), 수시(垂示), 착어(着語), 평창(評唱)의 다섯 부분의 중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본칙(本則)은 송나라 때 설두 중현(雪竇重顯, 980~1052) 선가가 가려 뽑은 백칙(百則)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고전적 선자(禪者)의 문답공안(問答公案)이다.
송(頌)은 100칙의 문답에 대한 뜻과 거기에 관련된 선승의 태도 등을 시로 평가하고 감상한 것이다. 이 두 부분은 설두가 편저한 것으로, <설두송고(雪竇頌古)>라고 한다.
수시(垂示)는 본칙 하나하나에 원오 극근(圜悟克勤, 1063~1135) 선사가 그 요지를 설명한 것으로, 각 칙의 뜻을 나타내는 간결한 서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모든 칙에 수시가 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는 수시가 없는 것도 있다. 
착어(着語)는 본칙 및 송의 장구 아래에 원오 선사가 단 짤막한 평으로, 일종의 경구(警句) 같은 것이다. 욕설 같은 것도 있고, 조롱하는 것도 있으며, 혐오감을 드러내는 말도 있다. 그 무렵에 쓰이던 비어와 속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선학 문답의 묘미를 한껏 드러낸 부분이다.
평창(評唱)은 본칙과 송에 대한 원오 선사의 강평(講評)으로, 비교적 장문이다.
이렇게 구성된 <벽암록>은 화두를 통한 수행을 강조하는, 이른바 ‘간화선(看話禪)’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공안집(公安集)인데, 화두(話頭) 100칙(則)을 모아서 10권으로 만들었다. 
대혜 종고(大慧宗杲) 선사는 이 책이 선(禪)을 형해화(刑骸化)하는 것이라고 해서 간본(刊本)을 회수해서 소각해 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선(禪)에 관심 있는 사람은 물론 출가한 스님들도 완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난해한 선어록이라서 선승들이 벽암록에 매달려 선 수행을 소홀히 하며, 흉내만 내는 구두선(口頭禪)에 빠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벽암록에는 가불매조(呵佛罵祖), 남전참묘아(南泉斬猫兒), 동산마삼근(洞山麻三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운문호병(雲門餬餠) 등 유명한 화두들이 많이 수록돼 있다.---→설두 중현(雪竇 重顯) 참조. 
※수시(垂示)---수시는 본칙을 읽기 위한 일종의 서문(序文)과 같은 내용이다. 문제의 핵심을 제시하는 머리말(序文)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선사(禪師)가 수행자에게 주는 훈시 같은 것으로 화두(話頭)에 대해 설하려고 할 때, 먼저 그에 대한 요점을 제시한 서문이다. 
※착어(着語)---공안(公案)에 붙이는 짤막한 평(評). 일종의 촌평(寸評)으로서 하어(下語)라고도 한다. 속담과 속어 투성이며, 문장의 응축력(凝縮力)이 뛰어나다. 
※평창(評唱)---평론(評論)과 제창(提唱-어떤 일을 처음 내놓아 주장하는 것)을 줄인 말이다. 대체로 본칙의 배경이 되는 고사(故事)와 인물 소개, 본칙 자체에 관한 설명과 주석의 역할을 한다. 
※송(頌)---문체의 일종으로인데, 송(頌)은 찬(贊)과 더불어 인간의 덕과 사물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글이다.
 
*벽지불(辟支佛, 빠알리어 paccekabuddha)---빳쩨까붓다(pacceka-buddha)에서 빳쩨까(pacceka)는 paṭi(~에 대해)+eka(하나)가 합성된 단어로 ‘각각 분리해서, 독립적으로, 별도로, 홀로’라는 뜻이다. 부처님 교법이 사라진 시대에 나서 부처님 법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깨달아서 세상에 법을 선포하지 않고, 반열반(般涅槃)에 드는 분이 바로 벽지불이다. 
벽지불(辟支佛)이란 중국에서 범어의 음을 그냥 쓴 말이고, 스승 없이 혼자 깨달은 사람을 가리키며 독각(獨覺)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물의 원인을 따져서 깨달았다고 해서 연각(緣覺)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성문(聲聞, sravaka)과는 달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 즉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도(道)를 깨치고, 고요와 고독을 즐기며 설법교화를 하지 않는 성자이다. 
독각은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남을 깨닫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으므로 완전한 부처와는 구별된다. 즉, 깨달았다는 뜻에서는 부처님과 같지만 중생들에게 법을 선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부처님과 다르다. 그리고 부처님 법을 의지하지 않고 깨달았다는 점에서 아라한과도 다르다. 
  상좌부 불교에 따르면 깨달음에 이르는 존재에는 부처, 벽지불, 아라한의 세 가지가 있다. 아라한은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제자, 즉 성문(聲聞, sekha)이라고 한다. 
부처, 벽지불, 아라한은 모두 깨달은 분들이지만 깨달음의 자질은 서로 다르다. 부처는 많은 중생들을 교화하고 구제할 수 있지만 벽지불은 홀로 지내는 부처들이어서 원칙적으로 법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을 구제할 수 없다. 아라한은 중생을 구제할 수 있긴 하지만 부처님처럼 많은 중생들을 구제하지는 못한다.
벽지불은 남에게 법을 전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이 얻은 깨달음은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이 꾼 꿈에 비유된다. 그리고 벽지불의 지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보살보다 낮은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한 시기에 오직 한 분만 출현하는 부처님과는 달리 출현하는 벽지불의 숫자에는 제한이 없다. 이들이 거주하는 곳은 히말라야에 있는 간다마다나(香醉山, Gandhamādana)산이라고 한다.
 
 
*변견(邊見)---오견(五見)의 하나. 변견이란 곧 편견이란 뜻이다. 자아를 비롯한 모든 것은 단멸한다거나 영원히 존속한다고 어느 한쪽에 치우친 극단적인 견해, 즉 ‘나’라는 존재에 집착해 내가 죽은 뒤에도 자아가 그대로 지속한다는 생각(有見, 常見)과 그 반대로 죽은 뒤에 자아는 아주 없어진다는 허무론에 빠지는 극단적인 생각(斷見, 無見)을 말한다. 즉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어느 한 극단에 사로잡혀 중심을 얻지 못하는 그릇된 견해이다. 변견을 다른 말로 아견(我見) 또는 아집(我執)이라 한다. 이것은 무아(無我), 평등(平等)이라는 불교의 중심원리와 거리가 먼 생각이다. ---→오견[(五見)=오리사(五利使))], 견혹, 10사(十使) 참조.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유식 삼성설(三性說)의 하나. 변계(遍計)는 모든 것을 치우치게 헤아리고 억측한다는 뜻이고, 소집(所執)은 분별해 집착한다는 말이다. 우리 중생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보고 집착한다는 말이다. 이 변계소집성의 이치를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는 뱀과 밧줄과 삼(麻)에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이를 ‘사승마(蛇繩麻)’라 한다. 뱀 사(蛇)자, 노끈 승(繩)자, 삼 마(麻)자, ‘사승마’란 우리 중생이 망상으로 고집하는 견해를 말한다. 
즉, 저녁 어슴푸레한 때에 길바닥에 떨어진 삼으로 만든 밧줄 토막을 뱀으로 잘못 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밧줄 토막인데 어슴푸레해 광명이 없으니까 잘못 봐서 뱀이라 고집하는 그것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에 해당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눈(眼)ㆍ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과 마음(意), 이렇게 여섯 가지[육근(六根)]를 구비하고 나온다. 이 육근에서 작용이 일어나면 눈(眼)은 색(色-물질)을 보고, 귀(耳)는 소리를 듣고, 코(鼻)는 향기를 맡고, 혀(舌)는 맛을 보며, 몸(身)은 촉감을 느끼고, 마음(意)은 온갖 일들(法)에 대한 생각을 일으킨다. 주관인 육근이 만나는 객관 즉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 여섯 가지 상대를 육경(六境) 혹은 육진(六塵)이라고 한다. 
이러한 눈ㆍ귀ㆍ코ㆍ혀ㆍ몸 다섯 가지 오근은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정보, 즉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의 다섯 가지 경계를 받아들이고, 내부에서 받아들인 정보(일체법)을 판단하고 정리한다. 그런데 판단하는 마음(의식)이 ‘있는 사실’ 그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자기가 축적해 놓은 경험 즉 업(業)에 의해서 판단한다.
따라서 그 판단이 자기중심적이어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외부에서 받아들인 정보를, 내부의 마음인 의근(意根)은 과거의 습관화된 잠재의식에 의해서 판단하고 결정한다. 이와 같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자기가 익힌 습관 즉 업(業)에 의해 판단하기 때문에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육근(六根)이란 업(業)의 그림자요, 육진(六塵)이란 육근(六根)의 그림자이다.
이처럼 치우치게 봐서 집착하는 성품인 변계소집성은 우리 중생들의 망령된 마음, 잘 못 보는 그 마음에 있다. 즉 의식(意識)에 잘못이 있는 것이지, 원래 우주의 도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성인은 함부로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이 없다.---→유식삼성(唯識三性) 참조.
 
 
*변공(邊空)---실재하지 않지만 설명을 위해 가설한 방편 공을 말한다. 공 가운데는 일체가 있을 수 없다. 만약에 뭔가가 있다면 공일 수가 없다. 공 가운데 없다는 무(無)는 절대적인 없음을 말한다. 오온과 그 오온을 세분한, <반야심경>에서 지적하듯 모든 것은 아주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변공(邊空)이라고 한다.
없음(無)이라는 것은 진리인 중도를 설명하기 위해 공과 반야의 양변으로 나누어 방편으로 체(體)의 관점인 변공을 가설하고, 그 가운데 절대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에 있어서는 변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로 일체가 없는 변공이 있다면 그냥 무(無)라고 하고, 더 이상 여러 무를 시설할 수가 없다. 공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무(無)를 시설했지만 기실 그 뜻은 이 경전의 이름이 <반야심경>이듯이 반야를 말하기 위한 것이다. 반야 역시도 진리 중도의 한 변(邊)이다.
무아니 공이니 하면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변공(邊空)으로서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일뿐이다. 단독으로 따로 무아나 공은 존재할 수 없다. <반야심경>에서 공 가운데는 일체가 없다고 했는데 바로 그것이 변공이다. 그런데 그것을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변견으로서 단멸외도 사상이다. 우리가 유나 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 즉 변견(邊見)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보살과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지해 열반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 것이다.
제법이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도 상견(常見)으로서 변견인데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일뿐이다. 무아니 공이니 하는 것은 진여공, 반야공, 색성공, 중도공으로 제법 그대로가 공한 성품이라는 것으로 묘유(妙有)인 진공을 말하는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그대로 여여한 진공(眞空)인 것이다. 중도이다. 다만 중생이 그것을 바로 보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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