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원효(元曉) 대사의 저술. 원효 대사의 많은 저술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20여 가지 가운데 하나인 <법화경종요>는 책 제목이 보여 주듯 <법화경>의 가장 중심 되는 가르침[종취(宗趣)]과 중요한 뜻[요의(要義)]을 간략하게 밝혀 놓은 저술이다. 즉, 원효 대사가 <법화경>의 내용을 집약하고 핵심요지를 설명한 해설서이다. 1권으로 돼있으며, 현재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 안에 포함돼 있으며, 서문은 조선 숙종 때 편찬된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분량은 얼마 되지 않으나 그 내용은 매우 짜임새 있게 간추려져 있으며 독창적인 해석이 많은 원효 대사의 저술 중 중요한 것의 하나로 꼽힌다. ‘종요(宗要)’란 분석과 종합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대립하는 논리들을 화쟁시키는 원효의 독특한 서술방식을 말한다. 원효 대사는 이 책을 통해 성문승ㆍ연각승ㆍ보살승의 3승이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일불승에 포섭된다고 하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사상을 논리적으로 규명해 회통불교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 책의 첫머리에서 〈법화경〉을 해석함에 다음과 같이 6문을 열어 분별한다고 했다. ① 전체 대의를 서술함, ② 경의 종지를 밝힘, ③ 경문의 묘용을 밝힘, ④ 경의 제목이 지닌 의미를 풀이함, ⑤ 교판 상의 위치를 가림, ⑥ 소문(消文:축자적인 해석, 문구의 뜻을 풀이함(그런데 이것은 다루지 않았음, 즉 소문은 풀이가 없다.)
*법화문구(法華文句)---법화삼대부(法華三大部)의 하나, <법화경> 28품의 모든 문장을 해석한 주석서이다. 천태대사 지의(智顗, 538~597)가 저술하고, 장안 관정(章安灌頂, 561-632)이 정리했다. <법화경>의 깊은 뜻을 짧은 용어나 숙어(熟語)로 담아 알기 쉽게 간추려서 다듬어 놓은 논서이다.
*법화삼대부(法華三大部)---법화경을 해석한 <법화문구(法華文句)>, <마하지관(摩訶止觀)>, <법화현의(法華玄義)>를 일컬으며, 모두 천태종(天台宗) 개조인 천태대사 지의(智顗)가 저술하고, 그의 제자 장안 관정(章安灌頂, 561-632)이 정리했다.
*법화삼매(法華三昧)---<법화경>에 의거해 중도(中道)의 이치를 관하여 죄업을 참회하는 수행법을 말한다. 모든 현상을 거두어들여 대립이나 차별을 떠난 하나의 참모습에 귀착시키는 삼매이다. 죄의 종류는 풀잎이나 나무 잎에 이슬이나 서리가 맺힌 것과 같이 한없이 많다. 그러나 햇살이 비치면 이슬이나 서리는 금시 사라져버린다. 그와 같이 중생이 지혜를 닦으면 그 지혜의 빛, 곧 지혜 광명으로 모든 죄(罪)는 저절로 사라져 버리는 부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 수행방법은 먼저 육시오회(六時五悔)라 해, 아침ㆍ낮ㆍ해질녘ㆍ초저녁ㆍ밤중ㆍ새벽의 여섯 때를 정해 참회ㆍ권청(勸請)ㆍ수희(隨喜)ㆍ회향(廻向)ㆍ발원(發願) 등 5문(門)의 차례에 따라서 죄를 소멸시켜가는 방법이다. 즉, 육시 중 어느 때든지 먼저 이미 지은 죄를 뉘우치고 장래에 죄를 짓지 않겠다는 참회를 한 뒤 모든 부처님이 영원히 이 세상에 머무르기를 권청하며, 질투하는 생각을 버리고 남의 여러 가지 착한 일을 칭찬하는 수희의 마음을 기른다. 그리고 닦은 모든 선근(善根)을 진리의 체험과 중생의 구제에 돌리는 회향을 한 뒤, 또 다시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소원을 나타내어 앞의 네 가지 행을 인도하는 발원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삼매를 이루기 위해서는 몸과 입과 뜻을 잘 단속해야 하는데 이를 신개차(身開遮)ㆍ구설묵(口說默)ㆍ의지관(意止觀)이라고 한다. 보통 21일을 기한으로 해서, 걷거나 앉거나 <법화경>을 독송하면서 우주의 참모습을 주시하는 삼매이다. • 신개차(身開遮)는 몸을 열고 닫는다는 말로서, 다니거나 앉아서 행하는 수행은 부지런히 행하지만 머무르거나 눕는 행동은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 구설묵(口說默)은 입으로 설하고 침묵을 지킨다는 것으로 입으로 <법화경>을 외우고 다른 일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의지관(意止觀)은 뜻으로 지관하는 것으로 <법화경> ‘권발품(勸發品)’에 의거해 평소에는 <법화경>을 외우되 앉으나 서나 다니거나를 가리지 않고 일심으로 문자를 외우며, 육시에 육근(六根)으로 지은 죄업을 참회하는 것을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의천(義天)이 천태종을 세운 뒤에 이 종파를 중심으로 법화삼매를 닦는 것이 크게 유행했고, 고려 중기에는 요세(了世)가 세운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를 중심으로 이 삼매를 닦고 익혔으며, 고려 말에는 몇 곳에서 이 삼매를 닦는 결사가 유행했으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고 있다.
*법화삼부경(法華三部經)---<법화경(法華經)>, <무량의경(無量義經)>, <불설관보현보살행법경(佛說觀普賢菩薩行法經=관보현경/觀普賢經)>을 합해서 법화삼부경이라 한다. 천태대사는 법화삼부경에서 <무량의경>을 개경(開經), 곧 서론(序論)에 올려 놓고, 법화경은 정종분(正宗分) 또는 정설분(正說分)이라 해 본론(本論)에 모시고, <관보현경>을 결론 곧 결경(結經)으로 끝맺음으로써 완전무결한 구세경(救世經)의 준거 틀을 세워놓았다.
*법화생(法化生)---<화엄경>에 니오는 말이다. 부모의 피를 받아 태어난 것이 아니라, 법의 교화를 받아 태어난 것을 법화생(法化生)이라고 한다. 여래의 법으로부터 화생한 것이란 말이다. 우리 모두는 부처님의 아들 딸이다. 따라서 불자는 모두 부처님으로부터 법화를 받아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법화생이다. <법화경>에는 종불구생(從佛口生)이라 했다. 부처님의 입으로 태어난 제자라는 말이다. 부처님의 설법 소리를 듣고 발심한 제자라는 뜻이다. 우리 모두가 부처님의 아들딸이므로 부처님 정신으로 살아야 되는 것이다.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고려 말기의 승려 요원(了圓)이 <법화경>의 영험 사례를 모아 엮은 책. <법화경>을 지니고 독송, 필사(筆寫), 강설하는 가지가지 영험들의 실례를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여러 경전과 논서(論書)에서 찾아 엮은 것이다.
*법화칠유(法華七喩)---소승의 가르침에서는 성문승과 연각승, 보살승을 증득해 번뇌를 여의고 열반에만 머무르는 데에 만족했으나, 대승의 진리를 펴는<법화경>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각자 불성이 있음을 인식하고, 성불(成佛)의 가르침을 펴기 위해, 중생들이 잘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매우 실감나고 격조 높은 비유를 많이 담고 있다. 즉, 법을 이야기하고는 비유(譬喩)를 들어 경전을 뒷받침하도록 돼 있는데, <법화경>에는 많은 비유가 나온다. 그 중 대표적인 것 일곱 가지 비유를 ‘법화 7유’라 하며, 다음과 같다. 때로는 아홉 가지 비유를 들기고 한다. ① ‘비유품(譬喩品)’에 나오는 화택 비유(火宅 譬喩)이다. 집에 불이 났건만 그것을 모르고 철없이 노는 아이들을 보고, 아버지가 양거(羊車), 녹거(鹿車), 우거(牛車)가 문밖에 있다고 방편(方便)을 써서 달래어 화택(火宅)에서 아이들을 구해내는 이야기인데, 그 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문 밖으로 나와 보니 세 수레는 없고 그 대신에 대백우거(大白牛車)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은 물론 우리들 중생이고 아버지는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그동안 방편으로 한 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菩薩)의 삼승(三乘)을 다 모아 성불이라는 일불승(一佛乘)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비유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부처님이고, 아이들은 중생이고, 양거ㆍ녹거ㆍ우거는 삼승을 일컬으며, 대백우거는 일승의 비유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삼계는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탐(貪)ㆍ진(瞋)ㆍ치(痴) 삼독(三毒)에 물들어 고통과 갈등의 삶을 살아가지만 결국은 다 그것을 끊고 성불의 길로 나아간다는 크나 큰 선언이 되는 것이다.---→삼거가(三車家) 논쟁 참조. ② ‘신해품(信解品)’에 나오는 궁자 비유(窮子 譬喩)이다. 장자의 아들이 어려서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가 성장했다. 때 마침 장자가 아들을 찾았으나, 그 아들이 두려워하며 다시 도망을 쳤다. 그래서 장자가 꾀를 내어 그를 고용인으로 받아들여 점차 지위를 높여주고, 결국에는 자신의 친아들이라는 것을 밝히고 일체의 재산을 다 주었다. 이 궁자(窮子)를 이승(二乘)의 사람에 비유하고 재산을 대승(大乘)에 비유한 것이다. 또한 낮은 수준에서부터 수행을 쌓아가면서 지견(知見)이 열려 마침내 부처님의 온전한 지혜와 덕을 모두 이어받아 성불한다는 <법화경>의 생명을 가르치는 비유가 된다. ③ ‘약초유품(藥草喩品)’에 나오는 약초비유이다.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는 고루 넓게 사방의 어디에나 내리지만 비를 맞는 숲 속의 풀과 나무들은 같지 않아서 크고 작게 자라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한량없는 법은 일미평등(一味平等)인데, 중생들의 성품에 따라 각각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고 작건 간에 풀과 나무들이 당연히 자라고 있는 것처럼 세간 중생들이 점차로 수행해 보살도(菩薩道)를 행하여 성불한다는 것이다. ④ ‘화성유품(化城喩品)’에 나오는 화성비유이다. 지혜가 뚫린 한 도사가 먼 길을 가느라고 극도로 피곤해 있는 대중들에게 신통으로 길 도중에 환상의 성을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게 해 피로를 풀게 한 후에 다시 성을 없애고 진짜 목적지로 향한다는 말로서 ― 피로를 풀게 한 후 진실을 설해준다는 비유이다. 이것은 중생을 교화(敎化)할 때에 각자의 근기에 맞는 방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⑤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에 나오는 계주비유(繫珠譬喩)이다. 의리계주(衣裏繫珠)의 비유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이 친구를 찾아갔을 때 친구가 술에 취해 떨어져 자고 있는데, 그 사람 옷에 매우 값나가는 구슬을 넣어 주고 왔지만 그 사람은 구슬이 있는 줄을 모르고 다른 나라에 가서까지 고생을 했다. 그러다가 조금 소득이 생기면 만족하고 사는 정도였는데, 하루는 구슬을 넣어준 친구를 만나게 돼 무가보주(無價寶珠)가 자기 옷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들이 끝내 얻어야할 것이 부처님의 지혜인데 그 동안은 번뇌가 사라진 열반에만 만족하고 살았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비유이다. ⑥ ‘안락행품(安樂行品)’에 나오는 왕계비유(王繫譬喩)이다. 전쟁에 나가 공을 세웠을 때 그 부하에게 땅이나 보물은 줄지언정 전륜왕(轉輪王)의 상투 속에 있는 구슬은 주지 않는 법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구슬은 하나뿐이기 때문에 권속(眷屬)들이 크게 놀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중생들로 하여금 멸도하게 해 열반에는 이르게 했지만 <법화경>을 설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여래(如來)의 으뜸가는 법인 <법화경>을 이제야 설해주는 것은 왕이 자신의 상투 속에 있는 구슬을 내어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⑦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나오는 의사비유(醫師譬喩)이다. 의사인 아버지가 집에 없을 때 아이들이 독약을 잘못 마셔 가지고 괴로워했다. 아버지가 집에 와서 그 모습을 보고 양약을 주었으나 본심(本心)을 잃은 아이들은 그 약을 먹지 않아 아버지는 다시 길을 떠나며 “아버지가 죽었다”하라고 일러 슬픈 나머지 마음을 바로 잡은 아이들이 양약을 먹어 병을 낫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아버지인 의사는 물론 부처님이고 아이들은 중생들이다. 본심을 잃은 아이들은 아버지의 처방을 한 번에 듣지 않으므로 아버지는 방편을 써서 본심을 되찾게 했다는 것으로 여기서도 근기가 낮은 중생들에게 내리는 방편으로 제도했다는 단순한 이야기도 되고, 나아가서는 태어나고 수행하고 열반의 모습까지도 방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방편으로 열반을 보이셨기 떄문에 부처님의 진실은 끝간 데 모를 과거로부터 미래에까지 닿아 있다는 부처님 생명의 영원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구비(九譬) 참조.
*법화행자(法華行子)---남을 위해, 세상을 위해, <법화경>을 온 세상에 펴는 사람을 말한다. 즉, 모든 인간에게 다 <법화경>을 믿게 하겠다는 굳건한 마음으로 펴는 이를 법화행자라 한다.
*법화현의(法華玄義)---천태 대사 지의(智顗, 538~597)가 저술하고, 관정(灌頂, 561-632)이 정리한 법화삼대부(法華三大部)의 하나. <법화경>과 천태학의 총론적 연구서이다.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의 경제(經題)에 대해서 <법화경>의 심원한 교리를 논설한 것으로서, <법화문구(法華文句)>와 합해 1구(具)가 되는 것이다. 법ㆍ묘ㆍ연ㆍ화ㆍ경의 순서로 석명(釋名)ㆍ변체(辨體)ㆍ명종(明宗)ㆍ논용(論用)ㆍ판교(判敎)의 오중현의(五重玄義)에 따라 자세히 설명했다. <법화현의(法華玄義)>는 <법화경> 글자 하나하나의 뒤에 숨어 있는 심오한 깊은 뜻, 현의(玄義)를 말한다. 예컨대, ‘무명(無明)’에 대해 풀기를, 변천무상한 현상경계를 바로 보는 눈이 열리지 않고 인과법칙(因果法則)의 도리를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혼암(昏暗)에 끌리어 진리를 진리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고 해서 문자 뒤에 숨어 있는 개념적인 것을 자세히 풀어놓은 것을 현의라고 한다. 무명이라는 글자는 두 자이지만 두 자 뒤에 숨어있는 뜻이 깊다. 이러한 내용으로 엮어져있는 논서이다.---→오중현의(五重玄義) 참조.
*법희선열(法喜禪悅)---<법화경> ‘오백제자수기품’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님)나라 중생들은 항상 두 가지 음식을 먹나니, 첫째는 법을 즐겨하는 음식(法喜食)이요, 둘째는 선정을 즐겨하는 음식(禪悅食)이니라.”고 했다. 그러니 법희선열이란 진리의 기쁨과 참선의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다. 깊고 참된 이치를 깨달았을 때 느끼는 기쁨이 마음에 가득하게 찬 상태를 법희선열이라 하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음의 기사에는 영 엉뚱한 장면이 우리를 실망시킨다. 2014년 11월 어떤 기사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말사 주지 품신 청탁 대가로 2명의 스님에게 8천만 원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된 B스님. 그리고 금품을 건넨 말사 주지 2명. 2009년 12월 항소심을 맡은 당시 대전지방법원 형사3부 김재환 부장판사는 <법화경>을 인용해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김 부장판사는 “불교경전인 <묘법연화경>에는 법희(法喜)와 선열(禪悅)로 음식을 삼아 다시 다른 생각이 전혀 없으며, 여인은 원래부터 있지 않으니 한 가지 악한 길도 없다고 하고 있다.”고 인용하며, “피고인들은 법희식(法喜食)과 선열식(禪悅食)이 아닌 황금식(黃金食), 뇌물식(賂物食)을 추구, 스스로 종교인인 자신들의 권위를 훼손했다”고 질타했다.』 법희식은 불법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닦아 선근을 자라게 하는 것을 음식에 비유한 말이고, 선열식은 선정의 기쁨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 지혜로움을 증장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법관으로부터 이런 훈계를 들어야 하는 게 오늘날 우리 스님들의 모습이다.
*벗 사품(四品)---부처님께서는 벗(友)에 사품(四品), 곧 네 종류의 품격이 있다고 하셨다. 즉, ①꽃과 같은 벗 ②저울과 같은 벗 ③산과 같은 벗 ④땅과 같은 벗이다. ①꽃과 같은 벗이라고 하는 것은, 꽃이 보기 좋을 때는 머리에 꽂았다가 시들면 버리는 것과 같아서, 부귀하면 붙었다가 빈천하면 버리기 때문이다. ②저울과 같은 벗이라고 하는 것은, 저울이 물건이 무거우면 머리를 숙이고 물건이 가벼우면 곧 추서는 것과 같이, 주는 것이 있으면 공경하다가 주는 것이 없으면 업신여기기 때문이다. ③산과 같은 벗이라고 하는 것은, 금산(金山)에 새와 짐승이 모이면 털과 빛에 금의 광채를 입는 것과 같이, 귀(貴)하면 능히 사람을 번영케 하고 부(富)하면 능히 함께 기뻐하기 때문이다. ④땅과 같은 벗이라고 하는 것은, 온갖 만물이 땅을 의지하는 것과 같이, 베풀고 기르며 두호해 은혜가 두텁기 때문이다.
*베나레스(Benares)---고대 바라나시(Varanasi)로서 현재의 베나레스(Benares),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주 남동부 갠지스강 연안에 위치한 인구 100만의 고대도시이다. 힌두교 성지이자, 불교 성지임---→바라나시(Varanasi) 참조.
*베다(Veda)---고대인도 브라만교의 교의와 제례규정을 담고 있는 문헌. 이란을 거쳐 인도에 들어온 아리안족이 그들의 우주와 인간에 대한 사유방법과 종교적 지식을 모아 편찬한 성전으로 신에 대한 제식(祭式)의 찬가집이다. <베다>는 브라만교의 성전(聖典)을 총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베다(Veda)란 ‘안다’라는 고대 산스크리트어 비드(vid-)에서 파생한 말이다. 지식 또는 지혜를 뜻하며, 넓은 의미로는 '기록될 가치가 있는 지식 전체'를, 좁은 의미로는 '성스러운 지식이나 종교적 지식'을 뜻한다. 고대 인도의 종교 및 사상과 관련된 노래ㆍ시ㆍ가사ㆍ기도문ㆍ제의방식ㆍ주문 등 방대한 지식을 담고 있으며, 고대 인도 종교, 철학, 우주관, 사회상을 담고 있어 역사 문학적 가치가 높다. 학자들은 기원전 수십 세기 전부터 구전돼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브라만교 전통에서는 베다를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천상의 영역에서 신의 영감과 계시를 받은 리시(rishi, 선지자)를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며, 4베다[사폐타(四吠陀)]가 있다. ① 리그베다(Rg-veda, 찬가/讚歌) - 가장 중심이 되는 찬가로, 자연신을 찬미하고 아울러 가족의 번영을 기원한 종교적 서정시, 찬가를 집대성한 노래집. ② 사마베다(Sama-veda, 가사/歌詞) - 제관(祭官)이 부르는 노래를 모은 것. ③ 야주르베다(Yajur-veda, 제사/祭詞) - 공양, 희생, 제사를 위한 내용. ④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 주사/呪詞) -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내용. 이러한 베다는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뉘는데 삼히타(Samhita-本集), 브라흐마나(Brahmana-祭義書), 아라냐카(Aranyaka-森林書), 우파니샤드(Upanishad-秘義書)가 대표적인 베다 분류법으로서, 베다는 고대로부터 이러한 단계를 거쳐 발전해왔다. 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그 성립이 오래된 것이 리그베다로서 기원전 1500년에서 1000년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를 베다시대라고 하며 바라문 문화의 제1기에 해당한다.
*베단타(Vedanta)---베단타라는 단어는 ‘베다-안타(Veda-anta)’를 말하며, 이는‘베다의 끝’ 또는 ‘베다에 더해진 부록’이라는 뜻인데, 베다(Veda)는 지식을 뜻하고, 베단타(Vedanta)는 문제의 순수한 본질이 되며, 잘 제시되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지식을 말한다. 우파니샤드(Upanisad)도 베단타에 속한다. 그래서 힌두 철학에서 베단타(Vedānta)라는 단어는 베다 중 우파니샤드와 동의어로 사용됐다. 이 뜻이 심화돼 ‘베다의 목적, 목표 또는 최종 도달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베단타 철학은 범신론적 ․ 관념론적 일원론으로서 바라문 사상의 주류이다.
*베단타(Vedanta)학파---인도 육파(六派) 철학의 하나. 베단타 학파의 개조(開祖)는 1세기경의 바다라야나(Badarayana)라고 하나 그의 전기(傳記)는 분명치 않다. 베단타학파는 상키아 학파의 2원론을 부정하고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일원론을 견지한다. 경전으로는 <베단타 수트라(4~5세기, 브라마 수트라라고도 한다)>가 있으나 극단적으로 간결하기 때문에 주석 없이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많은 사람이 주석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주석의 차이로부터 분파가 생겨남으로써 베단타 철학의 발달을 촉진했으며, 그 결과 베단파 학파는 힌두교의 육파 철학 중에서 가장 유력한 학파가 됐다. 사상적으로는 베단타학파는 베다 성전 가운데에서 특히 우파니샤드를 중요시하는데, 우파니샤드의 여러 현자들 중에서도 우다라카(Uddalaka)의 사상을 중심으로 해서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여러 사상을 조화시키고 통일을 꾀했다.
*베살리(빠알리어 Vēsalῑ)---부처님 당시 인도(북부)에 비교적 큰 나라가 16국이 있었다. 그 중 가장 강했던 나라는 마가다(Magadha)국이었고, 부유히기로 이름났던 도시 ‘베살리’는 밧지(Vajji)국에 있었다. 부처님이 밧지족을 칭찬한 것은 일곱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납바나경>에 설명돼있는 일곱 가지 불퇴전의 원리는 1) 자주 모이고 자주 만나는 것, 2) 화합하는 것, 3) 공인된 것을 수용하는 것, 4) 노인들을 공경하는 것, 5) 폭력으로 제압하지 않는 것, 6) 탑묘에 공양하는 것, 7) 거룩한 님이 밧지에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곱 가지 이유를 들어 밧지족은 번영하지 퇴전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에 들고 난 후 마가다왕 아자타삿뚜의 간계에 의해 밧지는 마가다국에 흡수되고 말았다. 당시 베살리에는 대림정사(大林精舍)와 그 안에 유명한 중각강당重閣講堂)이 있었다. 당시 부처님과 자이나교도 삿짜까(Saccaka)와의 대론(對論)도 중각강당에서 이루어졌다. 부처님은 삿짜까와의 대론에서 승리하셨다. 이는 다름 아닌 자이나교와의 승리이기도 하다. 그날 오백명이 이 대론을 지켜봤다고 한다. 당대 최고 논사 삿짜까를 무아의 가르침으로 제압한 것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승리는 게송으로도 전해져 온다. 그 게송을 한역으로 길상승리게(吉祥勝利偈)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승리와 축복의 게송’이라 한다.---→웨살리(빠알리어 Vēsalῑ) 참조.
*벽관(壁觀)---‘벽관’은 말 그대로 벽을 관하고 있다는 말이다. 달마(達摩) 대사는 인도로부터 중국 남쪽 양(梁)나라에 들어와서 선법(禪法)을 펼치려 했지만 양무제(梁武帝)와 서로 기연이 맞지 않아서 북위(北魏)로 가서 하남성(河南省) 숭산(嵩山) 소림사(小林寺)로 숨어들어 9년간 면벽수행(面壁修行)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달마 대사는 하루 종일 벽만 관하고 있는 바라문, 곧 ‘벽관 바라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벽을 향해 앉아 혼자 좌선삼매에 드는 것을 ‘면벽정진(面壁精進)’이라 하고, 벽을 마주하고 좌선한다고 해서 벽관이라 한다. 그런데 벽관을 단순히 면벽좌선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벽관(壁觀)은 '벽을 본다'가 아니다. '벽이 되어 보는 것'이다. 달마의 면벽은 벽과 하나가 돼 자기와 세계를 관하고 있다. 무엇을 보느냐? 공(空)을 관(觀)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공을 지켜보는 것이다. 때문에 벽관엔 시종일관 긴장감이 팽팽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면벽은 외부세계와 단절이 아니다. 달마의 면벽은 벽과 하나가 돼 자기와 세계를 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벽관은 ‘회광반조(廻光反照)’의 뜻을 품고 있다. 그래서 송 대의 종감(宗鑑, ?~1206) 선사가 저술한 <석문정통(釋門正統)>에 벽관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마음을 안정(如是安心)함이란 벽관을 말한다. 객진위망(客塵僞妄)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벽’이라 한다. 마치 가옥 외벽이 외부 풍진을 방지하는 것과 같이 객진위망을 근접시키지 않는 마음의 긴장, 그것이 벽관이다.” 이와 같이 벽관이란 참다운 마음의 안정이며, 벽(壁)은 먼지나 티끌처럼 밖에서 오는 번뇌를 들어올 수 없도록 막아주므로 마음을 집중해 벽과 같이 함으로써 마음의 청정함이 유지되니, 벽관은 그러한 객진위망이 달라붙지 않는 내면적인 마음의 긴장을 의미한다. 달마 대사의 말씀 가운데 “바깥으로는 모든 연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의 헐떡임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가히 도에 들어간다(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牆壁 可以入道)”는 말은 벽관의 의미를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바깥의 여러 가지 반연들, 얽히고설킨 인연들을 일단 쉬어야 공부가 된다. 할 일 다 해가면서 남의 참견할 것 다 참견해가면서 전화 받을 것 다 받아가면서 하려면 공부가 제대로 안 된다. 왜 그럴까? 우리의 몸이나 마음이 다 에너지인데 이것이 분산되면 집중된 어떤 힘을 발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독서삼매라는 말에서도 보듯 어떤 일에 몰두할 때 바로 거기에서 삼매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내심무천(內心無喘)’할 때 ‘천’자는 ‘헐떡일 천(喘)’인데 정말 표현을 잘 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이 헐떡인다. 돈에 헐떡이고, 이성에 헐떡이고, 권세에 헐떡이고, 또는 콤플렉스를 갖고 뭔가에 헐떡이기도 한다. 그런 헐떡이는 마음이 푹 쉬어서(內心無喘) 마음이 마치 장벽처럼 무덤덤해야(心如牆壁) 가히 도에 들어갈 수 있다(可以入道)다.
*벽극풍동 심극마침(壁隙風動 心隙魔侵)---<선가귀감>에 나오는 말이다,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구니가 침범한다는 뜻이다. 마음 단속하라는 말인데, 아주 간단한 글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게 하고, 마음에 늘 새겨야 할 글귀이다. 여기서 마(魔)란 탐ㆍ진ㆍ치(貪瞋痴) 삼독심을 말한다. 모든 고통, 모든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 바로 삼독심이기 때문이다.